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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와 인접한 곳에 교동도가 있다.

교동도는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북한의 연백군과 마주보는 대한민국의 섬이다.

한반도에서 14번째로 큰 섬이다. 화개산(華盖山, 269m)이 가장 높은 산이다.

교동도는 강화도 창후리선착장에서 월선포선착장까지 15분 동안 배를 타고 다녔다.

물때가 나쁜 날은 수심문제로 멀리 돌아야 해서 1시간이 걸리기도 하였다.

2014년 교동대교가 개통된 후 출입이 한결 쉬어졌다.

그래도 최전방의 섬인지라 검문소에서 외부인의 출입 확인을 거치고 있다.

이웃 강화도와 석모도가

간척으로 현재의 해안선을 가졌듯이 교동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화개산, 수정산, 율두산이 만드는

삼각점 사이의 갯벌과 바다를 메워서 넓은 농경지를 얻었다.

교동평야를 만들었던 것이다.

교동평야의 끝자락에 바닷가와 인접한 난정저수지가 있고,

그 인근 마을에 고목의 은행나무가 우뚝 서 있다. 보호수이다.

이 은행나무는 교동면 무학리에 있다.

무학리는 고려 중엽에 무산서리라 불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이 은행나무를 ‘무산서리 천년수’라 부르기도 한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은행나무는 마을의 한 가운데에 버티고 있었다.

이 마을에서 가장 잘 사는 부잣집의 뒤쪽에 은행나무가 있었다.

어느 날 부잣집은 화재가 났다. 그때 은행나무도 함께 불에 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은행나무는 줄기 속까지 불에 타지 않고 겉의 잎가지만 불에 타서 그런지

이듬해 봄에 새가지가 나오고 잎이 돋아나서 자랐다.

이 나무가 현재 무학리의 천년수 은행나무이다.

지금도 은행나무 주변을 파면 숯과 부잣집의 기와조각이 나온다.

그리고 은행나무에서 놀다가 떨어진 사람은

떨어진 곳을 파내었을 때에 나오는 숯을 달여서 약으로 이용하였다.

아픈 곳이 신통하게 나았다. 이 은행나무는 신목으로 숭배되고 있다.

마을의 동제를 지내지 않지만 마을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정월대보름에 치성을 드리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무속인들이 종종 찾아와 푸닥거리를 하거나 신내림을 받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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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약초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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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늘 푸르게 자라는 상록수 중 가장 오래 자라는 나무가 서초동에 있다.

향나무이다. 보호수이다. ‘마뉘꿀(마뉘골) 고개’를 지날 즈음에 있다.

이 고개는 강남고속터미널에서 대법원으로 고갯길을 넘어가다

국립중앙도서관 고갯길의 작은 돌에 글씨를 새겨 안내하고 있다.

‘옛날 반포동 계곡에 마뉘골이라는 마을이 있어서 불린 고개로

호랑이나 산적들이 자주 나타날 정도로 으슥한 곳이었다 함’이라 적혀 있다.

보호수의 향나무는 이곳의 바로 옆 서초사거리에 있다. 서초역이다.

이 향나무는 교차로 한가운데에 서서 밤낮으로 오가는 차량 행렬을 내려다보고 있다.

대부분 법원이나 검찰청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의 어두운 표정을 지켜보고 있다.

이 향나무는 고려 태조 왕건의 후손이

나라의 발전을 기원하기 위하여 심었다는 설화가 구전하고 있다.

고려시대부터 온갖 비바람을 견뎌내며 서초동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개국을 지켜봤으며,

1457년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강원도 영월로 귀양을 가던 모습도 지켜보았다.

단종은 이 향나무가 있는 곳을 지나 영월로 유배를 갔다.

이후 인근에 사는 백성(주민)들이 이 향나무를

수호신으로 삼아 각별히 관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예전에는 어느 동네의 수호신이며 신목이었던 셈이다.

이 향나무가 있는 곳은 예전에 유명인의 집터이었다.

대법원이 들어서고 도로가 나면서 집이 철거되었으나

정원의 향나무는 오랜 논란 끝에 살려 두었다.

오래된 나무를 베면 화를 입는다는 이야기에다가

수령이 오래된 아름다운 나무를 보호하자는 의견도 있어서

결국 살아남게 되었다.

그 후 이곳의 향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1968년 보호수로 지정된 이후 ‘서초동 향나무’ 또는 ‘대법원앞 향나무’ 등으로 부르다가

2009년 11월 시민공모를 통하여 ‘천년향’의 이름을 얻었다.

관계기관은 명명식까지 성대하게 치르는 등 대접을 해주었다.

매년 정기적으로 청소도 하고 영양분도 투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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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약초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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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심었을까.

강남구 도곡동의 고목 느티나무는 조선시대 효자

김의신(金義信)의 집터로 알려졌으니 자생이 아니라 심었던 것이 맞는 것 같다.

그러나 심은 자가 누구인지는 알 길이 없다.

조선시대에 이곳에 살았던 김의신은 40세 때 느티나무 밑에서 백일기도를 하다가

산신령의 말에 따라 자신의 허벅지 살을 잘라 고아드려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김의신을 기리기 위하여 느티나무 뒤쪽에 효자비를 세웠다.

이 느티나무는 수령 73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노거수이다.

서울시 느티나무 중 가장 오래된 나무이다.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수형이 웅장하다.

이 느티나무는 조선시대 중엽부터 말죽거리 역마을 주민들이

매년 10월에 질병을 막고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동제(당산제)를 지내던 곳이다.

당집은 없고 느티나무가 수호신으로 남아 신목의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양재역 부근의 말죽거리 역마을은 과거 법정동으로 역삼동에 소속되어 있던 마을이다.

남쪽지역에서 서울로 올라올 때이거나 서울에서 지방으로 갈 때 거쳐 가는 곳이며,

이때에 이곳에서 ‘말죽을 쑤어 먹인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이 느티나무는 야트막한 매봉산 건너편의 아파트

단지 내의 어린이놀이터 옆에 위치하고 있다.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때 느티나무를 보호하기 위하여 건물 층고를 낮추고,

느티나무의 생육을 위하여 주변의 공간을 확보하였다.

주변 일정범위에 철망의 울타리를 설치하여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도록 하였다.

이 느티나무가 인접하고 있는 곳은 산지형 근린공원이 있다.

즉 도곡공원의 둘레에 작은 길이 나있어 아파트 주민들이 짧은 시간 산책을 할 수 있다.

주변의 정원도 꽃들과 함께 조각상들이 함께 장식되어 있어 아름다운 풍경을 즐길 수 있다.

느티나무 앞은 보호수 안내판과 제사를 지내기 위한 상석이 놓여 있다.

현재 강남문화원과 역말전통문화보존회 주최로

역말도당제 및 잿마당제 등을 겸한 ‘역말문화축제’가 펼쳐지고 있다.

역말을 떠나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옛 주민들도 도당제에 참여함으로써

역말 사람의 일체감을 확인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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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약초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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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주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나무가 있다.

빨간 벽돌의 주택가 사이에서 사면초가 형상으로 갇혀 있는 나무이다.

이 나무는 너무 좁은 골목에 있어 생육 공간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될 곳에 위치하고 있다.

가리봉동(2동)의 꽉 막힌 공간에서 하늘 높이 홀로 서 있는 측백나무이다.

수령 511년이 넘은 고목이다.

2004년 보호수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이 측백나무는 구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이 측백나무에 큰 뱀이 살고 있다는 설과

나무를 훼손하면 재앙이 온다는 설이다.

서양에서 뱀은 ‘악마의 사자’라고 하여 멀리하지만 한반도에서는 수호신처럼 여기고 있다.

구렁이가 오랜 세월이 지나면 용이 되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

주민들은 이 측백나무 속에 뱀이 살면서 나무와 마을을 지켜주는 것으로 믿고 있다.

지금은 좀처럼 이 측백나무 주변에서 뱀을 볼 수 없지만 예전에는 이 뱀이 자주 나타났다.

이 측백나무는 신목으로 받들었던 나무이다.

이곳에서 오래도록 살고 있는 주민들은 어릴 때에

이 측백나무 주변에서 소꿉친구들과 만나 재미있게 놀았다.

그러면서도 신성시한 나무라는 전설 때문에 무서워서 접근할 때 조심하였다.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 같아 가지를 함부로 꺾지도 않았다.

지금 이 측백나무는

가지를 훼손하면 재앙을 내릴 만큼의

풍성한 모습에다가 세월의 흔적만큼이나

옹이 사이사이가 충전 처리로 메워져있다.

주택 사이의 좁은 길에 있어서 가지를 많이 쳐냈다.

주민들은 6.25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정월대보름 때에 이 측백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지냈다.

마을을 보호하는 신목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측백나무제는 2003년부터 매년 10월에

가리봉동 주민자치위원회 주관으로 열리고 있다.

주민들의 무사안녕을 비는 기원제를 겸한 축제 형식으로 실시되고 있다.

좋은 일이 많이 생기길 기원함은 물론

주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뭉쳐주거나

화합을 기원하는 의미도 담고 있다.

제례행사 후에는 주민 한마음 축제도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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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약초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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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나무는 최고의 길상목으로 꼽는 나무이다.

회화나무를 집안에 심으면 가문이 번창하고 큰 학자 또는 큰 인물이 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들이 태어나면 회화나무를 심고, 선비나무로 부르는 이유가 그것이다.

회화나무는 매우 귀하고 신성하게 여겨 궁궐, 양반집, 서원, 절에 심었다.

서울시 중구 정동도 원래 궁터이었다.

캐나다 대사관이 위치한 정동의 길은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다.

특히 덕수궁길이 유명하다.

이 길은 덕수궁의 대한문에서 서대문 쪽으로 경향신문사까지 이어지는 꼬불꼬불한 곡선의 길이다.

문화와 역사가 서려있는 녹음의 길이다.

이 길에 오래 된 회화나무가 있다. 보호수이다.

이 회화나무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야기가 전한다.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이 회화나무 바로 옆에 캐나다 대사관이 있다.

2003년 캐나다 대사관을 신축할 당시에 이 회화나무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건축 과정이 진행되었다.

캐나다 대사관 신축 당시의 이 회화나무는 죽기 직전이라 할 만큼 좋지 않았다.

당시의 대사관 건물은 죽어가는 회화나무였으니 베어내고 넓게 지을 수도 있었다.

대사관 건물은 이 회화나무의 뿌리 부분을 고려하여 나무가 사는 데 방해되지 않도록 설계되었다.

이 회화나무의 뿌리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하여 일부러 대사관 건물을 뒤로 물러서 건축하였다.

대사관 건물은 굴곡진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렇듯 이 회화나무는 세심한 관리 끝에 싱그러운 모습을 되찾아 대사관의 자랑이 되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주한 캐나다 대사관은 2007년 12월에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환경재단이 주는 녹색 특별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정동의 역사와 오래도록 함께 한 회화나무는

캐나다의 산과 숲을 형상화한 대사관 건물과 조화를 이루며

정동의 길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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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약초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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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시의 제1호 보호수는 은행나무이다.

1968년 2월 26일에 지정되었다.

도봉구 방학동의 연산군 묘 옆에 있다.

서북쪽으로 원당 샘이 있고, 북쪽의 연산군 묘, 남

쪽의 아파트 단지가 있는 작은 공원에 있다.

이 은행나무는 수령 830년 정도이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노거수이고 보호수이다.

줄기 및 가지의 자람이 좋아서 수형이 아름답다.

이 은행나무는 큰 가지 아래에

여인의 젖꼭지 같기도 하고 남성의 성기 같기도 한

‘유주(乳柱)’가 신기한 모양으로 돌출되어 있다.

유주를 내민 이 은행나무에 치성을 드리면 산모는 젖이 잘 돌고,

자식을 낳지 못한 여인은 아들딸을 낳을 수 있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

때문에 종종 여인들이 이 은행나무를 찾아가 치성을 드린다.

이 은행나무는 6.25한국전쟁 등 지금에 이르는

질곡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 본 산증인이자 파수꾼이다.

그리고 신령스러운 나무라서 그런지

나라의 큰 일이 있거나 재난이 있을 때에 종종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났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기 1년 전인 1978년에도 불이 났다.

주변 사람들은 이 은행나무의 영험한 힘과 능력을 믿고,

해마다 정월대보름이 되면 이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를 지낸다.

제례는 원당골(예전 방학동의 중심 마을)에 오래 전부터 살아온

파평 윤씨(坡平尹氏) 집안이 주축이 되어 동네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제사 풍습은 산업화가 진행되고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맥이 끊겼다가 1990년대 말이 되어 다시 되살아났다.

그러나 이제는 영물에 대한 제사의 성격에서 벗어나

어르신의 경로잔치를 겸한 동네잔치 성격으로 틀이 변하였다.

이 은행나무는 원당골의 터줏대감으로 사람들을 하나로 묶었듯이

현재도 방학동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수나무이다.

이 은행나무의 동남쪽 200m 지점에 암나무의 은행나무가 있었다.

먼저 고사한 암나무와 함께 ‘부부 은행나무’라 불렀다.

두 나무는 몇 백 년을 서로 마주보며 사랑을 속삭여 왔다.

암나무는 1990년대 초 인근의 아파트 건립 당시 벌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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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약초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