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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고목은 마을을 지키는 신령한 존재로 인식하였다.

마을의 당산목은 힘든 일이 있거나 기쁜 일이 있을 때면

언제든지 달려가서 제일 먼저 알리는

마을의 터줏대감이자 신앙적인 존재였다.

옛 사람들은 오랜 세월을 견디고도 살아남은

고목에 대하여 겸허하게 머리를 조아릴 줄 알았다.

평택시 안중읍 학현리의 은행나무는

평택시의 보호수 중 가장 오래된 나무이다.

수령이 850년 정도의 커다란 고목이다.

마을의 당산목으로 신성시하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식재 내력이 구전되고 있다.

정치와 경제가 좋지 않은 고려시대 명종 때의 일이다.

젊은 스님이 학고개(하오개)를 지나다가

홀로 사는 과부의 집에 들러 하룻밤 유숙을 청하였다.

여인은 단칸방이었지만 스님을 박대할 수 없어

치마로 칸막이를 하고는 스님의 요청을 승낙하였다.

젊은 과부와 하룻밤을 묵게 된 스님은 끊어 오르는 욕정을 참지 못하고

잠든 여인을 품어보기 위하여 몸에 손을 대었다.

과부는 스님을 받아주지 않았다.

스님은 결국 과부를 품어보지 못하고

과부로부터 크게 꾸지람만 들었다.

스님은 그 후 부끄러움에

학고개의 우물가에서 목욕재계하고 수행을 하였으며,

이 마을에 정착하기 위하여 절을 짓는 등 온갖 고행을 하다가

득도하지 못하고 생을 마쳤다.

마을 사람들은 고생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스님을 측은히 여겼다.

그리고 스님이 죽은 자리에 은행나무를 심어주었는데,

이 은행나무가 현재 보호수로 지정된 것이다.

어느 구전설화가 그렇듯이

전설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구조가

스님과 정절을 지키는 여성을 등장시킨 것으로 봐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구조에

조선후기의 사회인식이 첨삭된 것으로 보인다.

각종 약재로 쓰는 은행나무는

‘살아있는 화석’이라 불릴 만큼 중생대 쥐라기 이후부터

현재까지 생존하는 가장 오래된 식물 중 하나이다.

오래 살며 수형이 크고 깨끗함은 물론 가을단풍이 아름답고 병해충도 거의 없다.

그래서 은행나무는 정자목, 풍치수, 가로수로 많이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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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약초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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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시 남면 한산리는 은행나무 7그루가 고목으로 자라고 있다.

수령은 100년에서 750년 정도이다.

한 마을에 단일종의 여러 그루가 노거수로 자라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래서 한산리는 은행나무를 상징목으로 삼고 있다.

한산리의 은행나무들은 나무가 위치한 주민들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으므로 보존이 잘되어 있는 상태이다.

대부분 마을 어귀에서 정자목 또는 마을을 지켜주는 당산목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한산리의 은행나무 고목 중

가장 오래살고 있는 은행나무는 수령이 750년 정도이다.

열매가 달리지 않는 수나무이다.

지상부로부터 2.5m 부위에서 11개의 굵은 가지로 나뉘어 자란다.

줄기 밑동이 약간 비스듬하다.

굵고 높이 자라고 있지만

생육이 좋지 않은 가지를 군데군데 잘라 놓은 곳이 많다.

수세를 강하게 하기 위한 조치처럼 보였다.

그래서인지 나뭇가지들이 역동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전하는 이야기가 그럴 듯하다.

마을 사람들은 실제의 이야기라 하고 있다.

이 마을에 가난하지만 어질고 착한 송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았다.

어느 날 밤이었다.

송씨는 도깨비가 은행나무에서 나타나 날마다 쌀가마를 갖다 주는 꿈을 꾸었다.

송씨는 아무래도 꿈이 예사롭지 않은 것 같아서

조상님께 제사를 지내려고 아껴둔 쌀로

떡을 하여 은행나무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송씨네 집은 마을에 큰 변고가 생겨도 탈이 없었고,

차츰 재산이 늘어서 큰 부자가 되었다.

이 은행나무는 마을 안쪽의 도로 옆에 자라고 있다.

1960년부터 매년 제사를 지내던 송씨는 부자가 되어 마을을 떠났고,

현재 그 송씨와 친척지간의 다른 송씨가 이어받아

은행나무의 숭배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은행나무 보호수가 있는 한산리는 양주시 남면에서 북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땅이름은 마을이 한가한 뱀의 꼬리 모양(한사미)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한산리 대부분의 지역을 은흥쟁이(은행정)로 불렀으며,

지금도 500년 이상 묵은 은행나무가 여러 그루가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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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약초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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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시 신북면 금동리 지동마을의 은행나무는 수령이 950년 정도이다.

이 은행나무는 금동리의 은행나무 보호수 몇 그루 중에서 천년수로 알려진 나무이다.

금동리의 아랫마을 입구에 있다.

수관이 부채꼴의 모양으로 넓게 퍼졌으며,

잎이 무성하여 생육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이다.

이 은행나무 주변은

찾아오는 방문객을 위하여 안내판, 안내석, 벤치를 설치하였으며,

나무 울타리를 만들어 보호하고 있다.

인근에는 야생화 학습체험장을 조성하여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현재 수세가 왕성하고 나무갓이 넓게 퍼져 있어 생육 생태가 좋은 편이다.

나머지 은행나무 보호수 3그루는 윗마을에 있다.

이 보호수의 은행나무는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왕위에 있을 때에 이 나무를 본 후 관심을 가졌다.

이성계는 어느 날 이 마을로 내려와

이 은행나무 밑에서 잣죽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성계가 왕방산 사냥 길에서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보고 말을 몰아 이곳에 왔다.

이성계는 이 나무 아래의 신라관에서 잣죽을 먹었는데,

그 후로 포천 잣이 임금님 진상품이 되었다.

이 은행나무는 1945년 광복과 6.25한국전쟁과 같이

나라의 경사 및 변고가 있을 때에 소리를 내어 울었다는 구전이 있다.

8.15광복 이전까지는 나무 앞에서 매년 태평성대를 기원하거나

수호신으로 여겨 대동제를 올리기도 하였다.

최근에도 이 나무를 숭배하여 찾는 사람이 있다.

간혹 외부사람 또는 무당이 찾아와 숭배하기도 한다.

이 은행나무는 1927년 무렵에 소유자가 나무를 베어 없애려고 하자

마을 주민들이 “마을을 지켜주는 당산목을 없애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려

지금까지 마을의 수호신이자 정자목로 활용되고 있다.

한편 은행나무 종자는 한방에서 진해, 강장, 보익의 효능을 지닌다고 하여 약재로 쓰고,

뿌리는 익기(益氣)를 필요로 하거나 허약을 보할 때에 약재로 사용한다.

잎에서 추출되는 징코민(Ginkomin) 성분은 혈액순환 개선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밝혀져 널리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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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약초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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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마을의 풍경이 완전히 사라지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뒷동산이 있고 사방이 트인 시골 풍경이었으나

지금은 아파트단지가 높게 들어선 곳이 되었다.

이곳은 천년수의 은행나무가 있는 동두천시 지행동이다.

이 은행나무 바로 옆의 공터는 현재 새로운 아파트단지 공사로 분주하다.

오래 살고 있는 이 은행나무는 조선시대 세조 때의

어유소(魚有沼, 1434䠭1489) 장군이 어릴 때에 이 은행나무 곁에 단을 쌓고,

그 곳에서 학문과 무예를 닦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래서 어유소 장군의 후손들은 이 나무를 조상의 얼을 기억할 수 있는 증거로 삼아

오래도록 귀중하게 지켜왔다.

이 은행나무는 매우 영험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은행나무는 조선의 고종 인산일(因山日)에 큰 가지를 스스로

내려놓으면서 온 나라에 찾아든 슬픔을 함께 슬퍼하면서

백성의 안녕을 걱정하였다.

6.25한국전쟁 때에는 큰 가지가 저절로 부러지는 등

국난을 미리 예견한 것으로 전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은행나무를 신목으로 여기고 있다.

사람들은 이 은행나무 아래에서 좋지 않은 일을 하지 않으며,

남을 비방하지도 않는다.

마을에서는 이 은행나무 곁에서 수신제(樹神祭)를 지낸다.

수신제의 이름은 지행동 ‘행단제’이다.

행단제는 한 해의 시작이 아니라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기에 행해진다.

해마다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어 마을을 환하게 밝히는

10월 상달 초하루에 나무 앞에 모여 굿을 올리는 것이다.

10월은 나무가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계절이기도 하고,

농사일로 살림살이를 이어가던 사람들이 한해를 잘 마무리하는 시기인 동시에

갈무리한 알곡을 제물로 올릴 수 있는 시기이다.

오랜 역사를 가진 행단제는 이제 지행동 마을을 넘어

동두천시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대표적 마을 축제가 되었다.

그래서 행단제는 지역의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동두천시 관계자, 동두천을 대표하는 문화단체인,

시민들이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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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약초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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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와 인접한 곳에 교동도가 있다.

교동도는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북한의 연백군과 마주보는 대한민국의 섬이다.

한반도에서 14번째로 큰 섬이다. 화개산(華盖山, 269m)이 가장 높은 산이다.

교동도는 강화도 창후리선착장에서 월선포선착장까지 15분 동안 배를 타고 다녔다.

물때가 나쁜 날은 수심문제로 멀리 돌아야 해서 1시간이 걸리기도 하였다.

2014년 교동대교가 개통된 후 출입이 한결 쉬어졌다.

그래도 최전방의 섬인지라 검문소에서 외부인의 출입 확인을 거치고 있다.

이웃 강화도와 석모도가

간척으로 현재의 해안선을 가졌듯이 교동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화개산, 수정산, 율두산이 만드는

삼각점 사이의 갯벌과 바다를 메워서 넓은 농경지를 얻었다.

교동평야를 만들었던 것이다.

교동평야의 끝자락에 바닷가와 인접한 난정저수지가 있고,

그 인근 마을에 고목의 은행나무가 우뚝 서 있다. 보호수이다.

이 은행나무는 교동면 무학리에 있다.

무학리는 고려 중엽에 무산서리라 불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이 은행나무를 ‘무산서리 천년수’라 부르기도 한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은행나무는 마을의 한 가운데에 버티고 있었다.

이 마을에서 가장 잘 사는 부잣집의 뒤쪽에 은행나무가 있었다.

어느 날 부잣집은 화재가 났다. 그때 은행나무도 함께 불에 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은행나무는 줄기 속까지 불에 타지 않고 겉의 잎가지만 불에 타서 그런지

이듬해 봄에 새가지가 나오고 잎이 돋아나서 자랐다.

이 나무가 현재 무학리의 천년수 은행나무이다.

지금도 은행나무 주변을 파면 숯과 부잣집의 기와조각이 나온다.

그리고 은행나무에서 놀다가 떨어진 사람은

떨어진 곳을 파내었을 때에 나오는 숯을 달여서 약으로 이용하였다.

아픈 곳이 신통하게 나았다. 이 은행나무는 신목으로 숭배되고 있다.

마을의 동제를 지내지 않지만 마을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정월대보름에 치성을 드리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무속인들이 종종 찾아와 푸닥거리를 하거나 신내림을 받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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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약초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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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시의 제1호 보호수는 은행나무이다.

1968년 2월 26일에 지정되었다.

도봉구 방학동의 연산군 묘 옆에 있다.

서북쪽으로 원당 샘이 있고, 북쪽의 연산군 묘, 남

쪽의 아파트 단지가 있는 작은 공원에 있다.

이 은행나무는 수령 830년 정도이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노거수이고 보호수이다.

줄기 및 가지의 자람이 좋아서 수형이 아름답다.

이 은행나무는 큰 가지 아래에

여인의 젖꼭지 같기도 하고 남성의 성기 같기도 한

‘유주(乳柱)’가 신기한 모양으로 돌출되어 있다.

유주를 내민 이 은행나무에 치성을 드리면 산모는 젖이 잘 돌고,

자식을 낳지 못한 여인은 아들딸을 낳을 수 있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

때문에 종종 여인들이 이 은행나무를 찾아가 치성을 드린다.

이 은행나무는 6.25한국전쟁 등 지금에 이르는

질곡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 본 산증인이자 파수꾼이다.

그리고 신령스러운 나무라서 그런지

나라의 큰 일이 있거나 재난이 있을 때에 종종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났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기 1년 전인 1978년에도 불이 났다.

주변 사람들은 이 은행나무의 영험한 힘과 능력을 믿고,

해마다 정월대보름이 되면 이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를 지낸다.

제례는 원당골(예전 방학동의 중심 마을)에 오래 전부터 살아온

파평 윤씨(坡平尹氏) 집안이 주축이 되어 동네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제사 풍습은 산업화가 진행되고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맥이 끊겼다가 1990년대 말이 되어 다시 되살아났다.

그러나 이제는 영물에 대한 제사의 성격에서 벗어나

어르신의 경로잔치를 겸한 동네잔치 성격으로 틀이 변하였다.

이 은행나무는 원당골의 터줏대감으로 사람들을 하나로 묶었듯이

현재도 방학동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수나무이다.

이 은행나무의 동남쪽 200m 지점에 암나무의 은행나무가 있었다.

먼저 고사한 암나무와 함께 ‘부부 은행나무’라 불렀다.

두 나무는 몇 백 년을 서로 마주보며 사랑을 속삭여 왔다.

암나무는 1990년대 초 인근의 아파트 건립 당시 벌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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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약초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