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1

« 2024/11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728x90

오래된 고목은 마을을 지키는 신령한 존재로 인식하였다.

마을의 당산목은 힘든 일이 있거나 기쁜 일이 있을 때면

언제든지 달려가서 제일 먼저 알리는

마을의 터줏대감이자 신앙적인 존재였다.

옛 사람들은 오랜 세월을 견디고도 살아남은

고목에 대하여 겸허하게 머리를 조아릴 줄 알았다.

평택시 안중읍 학현리의 은행나무는

평택시의 보호수 중 가장 오래된 나무이다.

수령이 850년 정도의 커다란 고목이다.

마을의 당산목으로 신성시하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식재 내력이 구전되고 있다.

정치와 경제가 좋지 않은 고려시대 명종 때의 일이다.

젊은 스님이 학고개(하오개)를 지나다가

홀로 사는 과부의 집에 들러 하룻밤 유숙을 청하였다.

여인은 단칸방이었지만 스님을 박대할 수 없어

치마로 칸막이를 하고는 스님의 요청을 승낙하였다.

젊은 과부와 하룻밤을 묵게 된 스님은 끊어 오르는 욕정을 참지 못하고

잠든 여인을 품어보기 위하여 몸에 손을 대었다.

과부는 스님을 받아주지 않았다.

스님은 결국 과부를 품어보지 못하고

과부로부터 크게 꾸지람만 들었다.

스님은 그 후 부끄러움에

학고개의 우물가에서 목욕재계하고 수행을 하였으며,

이 마을에 정착하기 위하여 절을 짓는 등 온갖 고행을 하다가

득도하지 못하고 생을 마쳤다.

마을 사람들은 고생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스님을 측은히 여겼다.

그리고 스님이 죽은 자리에 은행나무를 심어주었는데,

이 은행나무가 현재 보호수로 지정된 것이다.

어느 구전설화가 그렇듯이

전설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구조가

스님과 정절을 지키는 여성을 등장시킨 것으로 봐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구조에

조선후기의 사회인식이 첨삭된 것으로 보인다.

각종 약재로 쓰는 은행나무는

‘살아있는 화석’이라 불릴 만큼 중생대 쥐라기 이후부터

현재까지 생존하는 가장 오래된 식물 중 하나이다.

오래 살며 수형이 크고 깨끗함은 물론 가을단풍이 아름답고 병해충도 거의 없다.

그래서 은행나무는 정자목, 풍치수, 가로수로 많이 심었다.

:
Posted by 약초세상
728x90

양주시 남면 신산리는 남면의 중앙에 위치한 마을이다.

동쪽으로 한산리 및 입암리, 서쪽으로 매곡리,

남쪽으로 구암리, 북쪽으로 신암리와 접해 있다.

현재 신산리는 마을의 중심부를 감싸고 있는 군부대와

적성과 동두천방향으로 통하는 편리한 교통 때문에 유동인구가 대단히 많다.

양주군에서 자연친화적인 모습을 잃지 않고 있는 몇 안 되는 마을이다.

이러한 신산리에 고목의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 느티나무는 수령이 1,000년 이상이다.

양주시 남면사무소 뒤쪽의 사리산(舍利山, 425.7m) 자락에 위치한다.

즉 사리산 끝자락 아래 지촌말(윗말)의 이준(李準, 1545~1624) 사당(祠堂) 뒤에 위치한다.

1993년에 외과 수술을 받았다.

이 느티나무는 2개의 나무처럼 근원부터

2개의 굵은 줄기로 갈라져 각각 독립적으로 자라고 있다.

전체적으로 서로 휘감기듯 얽혀 있으며, 얽힌 하부는 양쪽의 주간 사이에

공간이 생겼다가 지상으로부터 2m 부위에서 다시 합쳐진 형상이다.

괴상하게 생긴 모양이다.

이 느티나무는 양주시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이며,

전주 이씨 선조가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유적지의 근처에서 오래 살고 있는 정도에 비하여

전하는 구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느티나무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떨어진 곳에는 또 다른 느티나무가 자란다.

또한 2곳의 느티나무 중간에 고목의 소나무가 있다.

이 소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각각의 느티나무와 50m 거리에 있다.

즉 고목의 보호수 느티나무, 보호수 소나무, 느티나무 순서로 위치하고 있다.

원줄기 위쪽에서 구불구불 굽어서 퍼진 소나무의 형상이 특이하다.

이 소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관리를 받고 있다.

이곳의 느티나무와 소나무의 고목들은

양주시 남면 신산리 마을을 굽어보며 자라고 있으며,

마을의 상징처럼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한편 느티나무 보호수는 이곳 이외에

신산5리 마을회관 뒤편 광수원이라는 마을 입구에도 있다.

본래 보호수로 지정되었던 느티나무는 2002년 화재로 불타서 없어지고,

그 옆에서 후계목처럼 자라던 느티나무가 주민들의 휴식 공간 역할을 하고 있다.

 

:
Posted by 약초세상
728x90

양주시 남면 한산리는 은행나무 7그루가 고목으로 자라고 있다.

수령은 100년에서 750년 정도이다.

한 마을에 단일종의 여러 그루가 노거수로 자라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래서 한산리는 은행나무를 상징목으로 삼고 있다.

한산리의 은행나무들은 나무가 위치한 주민들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으므로 보존이 잘되어 있는 상태이다.

대부분 마을 어귀에서 정자목 또는 마을을 지켜주는 당산목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한산리의 은행나무 고목 중

가장 오래살고 있는 은행나무는 수령이 750년 정도이다.

열매가 달리지 않는 수나무이다.

지상부로부터 2.5m 부위에서 11개의 굵은 가지로 나뉘어 자란다.

줄기 밑동이 약간 비스듬하다.

굵고 높이 자라고 있지만

생육이 좋지 않은 가지를 군데군데 잘라 놓은 곳이 많다.

수세를 강하게 하기 위한 조치처럼 보였다.

그래서인지 나뭇가지들이 역동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전하는 이야기가 그럴 듯하다.

마을 사람들은 실제의 이야기라 하고 있다.

이 마을에 가난하지만 어질고 착한 송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았다.

어느 날 밤이었다.

송씨는 도깨비가 은행나무에서 나타나 날마다 쌀가마를 갖다 주는 꿈을 꾸었다.

송씨는 아무래도 꿈이 예사롭지 않은 것 같아서

조상님께 제사를 지내려고 아껴둔 쌀로

떡을 하여 은행나무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송씨네 집은 마을에 큰 변고가 생겨도 탈이 없었고,

차츰 재산이 늘어서 큰 부자가 되었다.

이 은행나무는 마을 안쪽의 도로 옆에 자라고 있다.

1960년부터 매년 제사를 지내던 송씨는 부자가 되어 마을을 떠났고,

현재 그 송씨와 친척지간의 다른 송씨가 이어받아

은행나무의 숭배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은행나무 보호수가 있는 한산리는 양주시 남면에서 북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땅이름은 마을이 한가한 뱀의 꼬리 모양(한사미)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한산리 대부분의 지역을 은흥쟁이(은행정)로 불렀으며,

지금도 500년 이상 묵은 은행나무가 여러 그루가 자라고 있다.

:
Posted by 약초세상
728x90

포천시 신북면 금동리 지동마을의 은행나무는 수령이 950년 정도이다.

이 은행나무는 금동리의 은행나무 보호수 몇 그루 중에서 천년수로 알려진 나무이다.

금동리의 아랫마을 입구에 있다.

수관이 부채꼴의 모양으로 넓게 퍼졌으며,

잎이 무성하여 생육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이다.

이 은행나무 주변은

찾아오는 방문객을 위하여 안내판, 안내석, 벤치를 설치하였으며,

나무 울타리를 만들어 보호하고 있다.

인근에는 야생화 학습체험장을 조성하여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현재 수세가 왕성하고 나무갓이 넓게 퍼져 있어 생육 생태가 좋은 편이다.

나머지 은행나무 보호수 3그루는 윗마을에 있다.

이 보호수의 은행나무는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왕위에 있을 때에 이 나무를 본 후 관심을 가졌다.

이성계는 어느 날 이 마을로 내려와

이 은행나무 밑에서 잣죽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성계가 왕방산 사냥 길에서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보고 말을 몰아 이곳에 왔다.

이성계는 이 나무 아래의 신라관에서 잣죽을 먹었는데,

그 후로 포천 잣이 임금님 진상품이 되었다.

이 은행나무는 1945년 광복과 6.25한국전쟁과 같이

나라의 경사 및 변고가 있을 때에 소리를 내어 울었다는 구전이 있다.

8.15광복 이전까지는 나무 앞에서 매년 태평성대를 기원하거나

수호신으로 여겨 대동제를 올리기도 하였다.

최근에도 이 나무를 숭배하여 찾는 사람이 있다.

간혹 외부사람 또는 무당이 찾아와 숭배하기도 한다.

이 은행나무는 1927년 무렵에 소유자가 나무를 베어 없애려고 하자

마을 주민들이 “마을을 지켜주는 당산목을 없애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려

지금까지 마을의 수호신이자 정자목로 활용되고 있다.

한편 은행나무 종자는 한방에서 진해, 강장, 보익의 효능을 지닌다고 하여 약재로 쓰고,

뿌리는 익기(益氣)를 필요로 하거나 허약을 보할 때에 약재로 사용한다.

잎에서 추출되는 징코민(Ginkomin) 성분은 혈액순환 개선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밝혀져 널리 이용되고 있다.

:
Posted by 약초세상
728x90

이 향나무는 1990년대 후반

아파트가 들어설 때에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었던 적이 있다.

이 향나무는 당시에 어느 개인주택의 마당 끝에 자라고 있었다.

아파트 시공회사는 이 향나무를 뽑아내야 공사를 할 수 있다고 하였지만

마을 사람들은 마을을 지켜 준 나무를 없앨 수 없다면서 반대하였다.

그래서 이 향나무는 아파트 공사 중에 잠시 자리를 떠났다가

공사가 마무리 된 후에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결국 이 향나무가 마을을 지켜준 것이 아니라

주민들이 이 향나무를 지켜준 셈이 되었다.

 

 

시흥시 하중동의 관곡마을에 고목의 향나무가 있다.

보호수의 향나무이다. 보호면적은 30㎡이다.

이 향나무는 수령이 1,000년이라 기록하고 있다.

나무 나이에 비하여 외부형태가 곱게 보였지만 믿을 수밖에 없다.

오래된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생육이 양호하다.

약간 휘어진 굵은 줄기와 옆으로 뻗은 가지의 형태가 아름답다.

이 향나무는 이 마을이 생길 때에 식재한 나무라 하여 신성시하고 있다.

마을을 지켜주는 신목으로 생각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음력 정월에 길일을 택해서

이 향나무 앞에서 마을의 안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를 지내고 있다.

이 향나무는 마을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보다 도심이라 하는 편이 좋겠다.

아파트가 즐비한 곳의 도로 옆에 작은 공원이 마련되었고,

그 공원의 동산에 우뚝 솟아 있다.

일설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때의

이 향나무와 관련한 꿈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열병(장질부사)으로 고생하거나 목숨을 잃어가고 있을 때였다.

이 마을 출신의 권씨 성을 가진 사람이 어느 날 꿈을 꾸었다.

수백 명의 아이들이 마을을 향하여 몰려오는 꿈이었다.

권씨는 열병을 가진 아이들을 물리치지 않으면

마을 전체에 병원균이 돌아 큰 일이 날 것 같았다.

그때 그는 아이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는 아이들이 잘 볼 수 있는 동산 위의 향나무에 올라가서 호통을 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향나무에 걸터앉아 호통과 함께 지팡이를 흔들며 아이들의 접근을 막았다.

그랬더니 그 많은 아이들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후 며칠이 지나자 열병이 멈추고 마을이 평온해졌다.

한편 인근에는 향토유적으로 알려진 관곡지(官谷池)가 있다.

이 연못은 조선시대 강희맹이 세조9년 명나라에 갔다가

올 때 가져온 연꽃 씨를 처음으로 심은 곳이다.

 

 

:
Posted by 약초세상
728x90

농촌 마을의 풍경이 완전히 사라지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뒷동산이 있고 사방이 트인 시골 풍경이었으나

지금은 아파트단지가 높게 들어선 곳이 되었다.

이곳은 천년수의 은행나무가 있는 동두천시 지행동이다.

이 은행나무 바로 옆의 공터는 현재 새로운 아파트단지 공사로 분주하다.

오래 살고 있는 이 은행나무는 조선시대 세조 때의

어유소(魚有沼, 1434䠭1489) 장군이 어릴 때에 이 은행나무 곁에 단을 쌓고,

그 곳에서 학문과 무예를 닦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래서 어유소 장군의 후손들은 이 나무를 조상의 얼을 기억할 수 있는 증거로 삼아

오래도록 귀중하게 지켜왔다.

이 은행나무는 매우 영험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은행나무는 조선의 고종 인산일(因山日)에 큰 가지를 스스로

내려놓으면서 온 나라에 찾아든 슬픔을 함께 슬퍼하면서

백성의 안녕을 걱정하였다.

6.25한국전쟁 때에는 큰 가지가 저절로 부러지는 등

국난을 미리 예견한 것으로 전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은행나무를 신목으로 여기고 있다.

사람들은 이 은행나무 아래에서 좋지 않은 일을 하지 않으며,

남을 비방하지도 않는다.

마을에서는 이 은행나무 곁에서 수신제(樹神祭)를 지낸다.

수신제의 이름은 지행동 ‘행단제’이다.

행단제는 한 해의 시작이 아니라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기에 행해진다.

해마다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어 마을을 환하게 밝히는

10월 상달 초하루에 나무 앞에 모여 굿을 올리는 것이다.

10월은 나무가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계절이기도 하고,

농사일로 살림살이를 이어가던 사람들이 한해를 잘 마무리하는 시기인 동시에

갈무리한 알곡을 제물로 올릴 수 있는 시기이다.

오랜 역사를 가진 행단제는 이제 지행동 마을을 넘어

동두천시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대표적 마을 축제가 되었다.

그래서 행단제는 지역의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동두천시 관계자, 동두천을 대표하는 문화단체인,

시민들이 참여한다.

:
Posted by 약초세상
728x90

소나무가 왜 이럴까.

줄기가 위로 곧게 뻗은 것이 있는가 하면 구불구불한 것도 있다.

줄기가 아래로 처진 것도 소나무도 있고, 꼬인 것도 있다.

수형이 둥그스름하게 모양을 갖춘 종류도 있다.

밑동에서 줄기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소나무도 있다.

분류가 참으로 어렵다.

밑동에서 줄기가 갈라지는 소나무 종류도 또 다시 세분하고 있다.

여러 줄기가 지표면 가까이에서부터 갈라지면 다행송(多幸松)이라 하고,

지표면 위쪽 줄기에서 갈라지면 반송(盤松)으로 갈라본다.

비슷한 말로 다지송(多枝松), 천지송(千枝松), 만지송(萬枝松),

조선다행송 등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아무렇든 강화도에 특이한 소나무 종류가 있다.

아름드리의 줄기를 가진 것이 아니지만 오래도록 살고 있는 소나무 종류이다.

선원면 냉정리의 선원초등학교에 있다.

선원초등학교는

1922년 선원보통학교 설립인가를 받고, 1923년 4월 2일 개교한 학교이다.

이 학교의 교목이 ‘천지송’이다. 건물의 정중앙에 심어진 것이다.

이 천지송은 이 학교의 상징목이다.

이제는 학교 전통만큼이나 학생과 교직원, 지역 주민들의 큰 자랑거리가 된 나무이다.

이 천지송은 선원초등학교 1회와 2회 졸업생이 기념식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 이 천지송은 어떤 나무일까.

모양이 특별난 소나무 종류이다.

줄기가 지표면 가까이에서 갈라지므로

다행송이라 해야 하지만 흔히 반송이라 부르고 있다.

여기에서는 반송이라 부르기로 한다.

이 반송은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이 반송은 200년의 세월동안 잘 자라고 있다. 교정에서도 오래도록 살고 있다.

어린 학생들이 입학과 동시에 6년 동안 함께 하였던 나무이다.

아이들은 술래잡기를 하며 이 반송 주위를 여러 번 돌아다녔을 것이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뭐가 그리 재미가 있는지 열심히 뛰어 다녔을 것이다.

어렸을 때의 학교 운동장이 너무 크게 느껴졌던 것처럼

어린 학생들은 이 반송과 함께 하면서 얼마나 크고 위용스럽게 보였을 것인가.

어느 장난꾸러기 학생은 다칠까봐 훈계하는 선생님의 말도 듣지 않고

이 반송에 올라가 놀기도 하였을 것이다.

:
Posted by 약초세상
728x90

어릴 적에 둥구나무에서 놀던 추억이 그리운 사람들이 많다.

둥구나무는 무더운 한여름에 시원한 그늘과 휴식의 장소를 제공하였다.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이곳을 찾았다.

아이들은 낮잠 자다 말고 그냥 둥구나무로 갔다.

친구들 만나는 장소처럼 그냥 보고 싶어 둥구나무로 갔다.

심심하여 할 일이 없어도 그냥 둥구나무를 찾아 갔다.

둥구나무 아래는 어르신들이 ‘장기’를 두며 노는 곳이었다.

아줌마들은 이런저런 동네 사람이야기를 늘어놓았던 곳이 둥구나무 아래이었다.

땅따먹기, 공기놀이, 고누놀이를 하며 놀았던 곳이다.

교동도 양갑리에도 둥구나무가 있다.

마을 사람들이 ‘해나무’라 부르는 커다란 느티나무이다. 보호수이다.

이 느티나무는 단옷날에 처녀 총각들이 동아줄을 꼬아 그네를 만들어 놀았던 나무이다.

다른 동네 사람들도 지나다 그네를 뛰었다.

젊은 아줌마들이 타는 쌍그네는 그야말로 그네뛰기의 최고 멋이었다.

높이 올라 느티나무 잎을 입으로 따서 물고 내려오는 그네 기술은 최고의 멋이었다.

이 느티나무는 마을의 당산목이기도 하였다.

나뭇가지 하나 마음대로 자르는 것을 두려워하였던 신목이었다.

또한 이 느티나무가 자라는 곳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양갑리에서

산세나 지세로 보아 가장 좋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부자가 되는 최고의 명당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양갑리 마을에는 부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이 느티나무는 만세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기미년) 여름에 가지가 꺾어지기도 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당시 태풍으로 직경 50cm 정도의 몇 가지가 잘렸다.

그 후 가지가 자라나 오늘날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이 느티나무는 교동도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말없이 묵묵히 지켜보았을 전설의 느티나무이다.

또한 봄에 나뭇잎이 일제히 피었다가 가을에 잎이 일제히 떨어지면 풍년이 들고,

그렇지 않으면 그해 농사가 흉작이 든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영농기술이 발달하면서

민간에서 이어지는 전통지식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구전은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면서 점점 잊혀져가고 있는 것이다.

 

:
Posted by 약초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