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와 차문화 - 4. 신라 진감(眞鑑)과 충담(忠談)의 차 건강관련 정보/차(茶) 이야기2022. 1. 28. 09:03
진감 혜소(眞鑑 慧昭)
진감(774~850년) 선사는 27년간 당나라에 유학하였다.
6조 혜능의 현손(玄孫 - 5대 법손)으로 선을 배우고 행하였다.
불교 음악인 범패(梵唄)를 배워 우리나라에 최초로 전하기도 하였다.
830년에 귀국하고 대렴이 흥덕왕명으로 차씨를 심은 지리산 화개동으로 왔다.
옥천사(쌍계사의 전신)를 창건하고 범패를 가르쳤다.
850년, 선사가 쌍계사에서 입적하자
왕명으로 고운 최치원이 선사의 비문을 짓고 썼다.
비명은 ‘진감선사 대공령(大空靈)’으로 국보 제 47호 이다.
고운선생의 비문에서 선사의 차 생활을 이렇게 적고 있다.
다시 중국차를 공양하는 이 있으면
돌 솥에 섶나무를 때어
가루내지 않고 다려서는
차 맛을 모른다고 하며,
단지 배를 적실뿐이라 하네.
참됨을 지키고 속됨을 싫어함이 모두 이러하였네.
짧은 비문이지만 신라하대의
차 생활 일면을 알 수 있게 하는 당대의 금석문이다.
신라에서는 덩이차(團茶)를 가루 내어 끓여 마시는
당나라 육우가 지은 ‘다경(茶經)’과 같은 음다법이 행해졌다.
또 차를 끓이는 다구로 돌솥이 사용되었다.
굳이 중국차(漢茗)라 한 것은
신라에도 토산차가 있었다는 반증이 아닌가 한다.
선사의 모든 생활은 속됨을 싫어하고 진솔함을 지켰다(守眞惡俗)고 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가 가슴 깊이 새겨야 할 잠언이 아닌가 한다.
월명(月明)과 충담(忠談)
신라 35대 경덕왕(742~765년)시대,
정치는 사치와 주색으로 혼미하였지만
불국사와 석굴암이 건설되고 성덕대왕 신종이라는
에밀레종이 제작되는 문화의 황금시대였다.
경덕왕 19년(760년) 4월 1일,
해 두개가 나란히 나타나 10일 동안 없어지지 않는 괴변이 일어났다.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인연있는 스님을 모셔다가 꽃을 뿌리고
부처님을 공양하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월명스님을 모셔와 도솔가(兜率歌)를 짓게하고
산화공덕재(散花功德齋)를 지냈더니 해의 변괴가 사라졌다.
왕이 가상히 여겨 좋은 차(品茶) 한 봉과 수정염주 108개를 하사하였다.
지금까지 두 개의 태양은
왕과 정치적인 반대파를 상징하는 은유적인 표현이고,
왕은 미륵불에 의지한 신앙으로
이 난국을 타파하였다고 이해되어왔다.
그러나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지자
왕과 집권세력은 집권층과 백성들의 단합을 위해
혜성을 이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충담스님도 월명스님과 같은 화랑이자 향가작가였다.
스님은 삼짇날(3월 3일)과 중양절(9월 9일)에는
항상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차를 공양한 다승이었다.
경덕왕 25년(766년) 삼짇날,
휴대용 헌다구(獻茶具)와 차를 통에 담아 맨 채로 임금께 불려 갔다.
왕이 청화자 차 한 잔을 내놨다.
특이한 차 맛에 이상한 향기를 풍기는 차였다.
왕은 화랑 기파랑을 찬미한 사뇌가(詞腦歌)가 뜻이 심히 높다고 칭찬하고,
백성을 편하게 다스리는 노래를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충담스님은 안민가(安民歌)를 지어올렸다.
임금은 아비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린 아이라 한다면
백성이 그 사람을 알리라. …
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는 태평할 것입니다.
충담스님이 휴대용 다구로
임금도 먹어보지 못한 향기로운 차로 미륵부처님을 공양하고,
임금에게 한 잔 차와 함께 임금답기를 바라는 안민(安民)을 노래하였다.
여자를 억압한 차문화 - 봉차(封茶)
차나무는 농업이 발달한 최근세까지도
옮겨 심으면 죽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초의 선사의 ‘동다송(東茶頌)’의 첫 번째 노래에서
“천명대로 옮겨 살지 않고 남쪽에서만 자란다네(受命不遷生南國)”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중국의 차고전 ‘다소(茶疏, 許次서 지음)’에서 인용한 것이다.
차나무는 원래 옮겨 심지 못하니 (茶不移本)
반드시 씨앗에서 태어난다. (植必子生)
옮기지 말고 자식을 두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取其不移遷子之意也)
지금 사람들 역시 그 예식을 하차례라 한다. (今人猶名其禮曰下茶)
이미 16세기에 차산지인 중국의 남쪽지방에는
혼인 등의 예식에 차가 예물로 사용되고 있었다.
혼인을 하차례(下茶禮)라 하고,
신부는 차나무 같이 한 남자에게서만 자식을 낳으라는 뜻이었다.
우리나라도 언제부터인지 혼례가 정하여지면
신랑 집에서 신부집에 보내는 채단과 예장을
봉치 혹은 봉채(封采)라고 하였다.
이 봉채는 봉차(封茶)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신부집에 보내는 여러 예물과 함께 차 씨앗을 보냈기 때문이다.
신부가 신랑집으로 신행(新行)을 하면
처음 하는 일이 신랑집 사당에 제사를 올리는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을 잊고 신랑집 사람으로,
신랑집 귀신으로 살겠다고 다짐하며 사당 주위에 차씨를 심었다.
결혼한 여인들은
“받아들인 운명 같이 옮겨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면서
신랑의 운명에 따라 살아야만 하였다.
제례나 혼례에 차가 사용되면서 다례라 하였고,
차의 특성 때문에 여자를 옮아매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 것이다.
김 동 곤 (쌍계제다 대표)
출처 : 민족의학신문(http://www.mj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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